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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간 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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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파간 카간은 692년부터 716년까지 동돌궐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681년 형 일테리쉬 카간을 도와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동돌궐 제국을 부활시켰다. 통치 기간 동안 당나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고, 거란족을 공격하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698년에는 당나라 황족과의 혼인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었고, 705년에는 당 중종의 즉위로 혼인 제안이 거절당했다. 말년에는 내부 분열과 반란에 직면했고, 716년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중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궐특근이 비가 카간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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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간 카간
기본 정보
칭호카간
Chanyu
재위 기간692년 – 716년
계승자이넬 카간
자녀일테리시 카간(형)
아시나 두오시푸(형)
이넬 카간(아들)
왕가아시나
아버지에트미시 베그
출생일664년
사망일716년 7월 22일
사망지만주
이전 통치자일테리시 카간
출생명아시나 모초 (阿史那默啜)
종교텡그리 신앙
이름
한자遷善 (Qiānshàn)
아시나 성阿史那•默啜 (Āshǐnà Mòchuò)
옛튀르크어 (추가 표기)Qapγan qaγan
옛튀르크어 (추가 표기2)Qapaγan qaγan
옛튀르크어 (추가 표기3)Qapγan qaγan

2. 생애

일테리쉬 카간천수 (690년 - 692년) 초에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묵철련은 아직 어렸으므로, 동생 아사나 묵철이 가한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가한위에 올랐다.

장수 2년 (693년), 아사나 묵철은 령주를 약탈하고 백성을 죽였다. 무측천은 백마사의 승려인 설회의를 대북도행군대총관으로 파견하여, 18명의 장군을 지휘하여 이를 토벌하게 했지만, 동돌궐군과 조우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반대로 아사나 묵철이 사신을 보내 에 조공했으므로, 무측천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좌위대장군을 제수하고, 귀국공에 봉하고 물품 5천 단을 하사했다. 장수 3년 (694년)에도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으므로, 무측천은 또 다시 '''천선가한'''을 제수했다.

만세통천 원년 (696년), 거란 수령인 이진충·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부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아사나 묵철은 거란 토벌을 자원하여 거란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이로 인해 동돌궐은 점차 강성해졌다. 무측천은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 아사나 묵철을 책립하여 특진·힐질이시(일티리쉬: Iltiriš)[20]선우·입공보국가한으로 삼았다.

성력 원년 (698년) 5월, 아사나 묵철은 무측천의 아들이 되는 것, 딸을 시집보내는 것, 화친을 맺는 것, 더 나아가 항호[21]선우도호부의 땅에 농기구와 종자를 원한다는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무측천이 처음에는 이를 허락하지 않자, 아사나 묵철은 격노하여 사빈경 전귀도를 살해하려 했다. 이때 주 조정은 동돌궐의 병력을 두려워하여 납언 요숙·란대시랑 양재사의 건의로 그 화친을 허가하기로 하고,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7월, 무측천은 회양왕 무연수를 아사나 묵철의 딸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우표도위대장군 염지미를 춘관 상서, 우무위위랑장 양제장을 사빈경으로 삼아, 그들을 흑사남정에 파견했다. 그러나 아사나 묵철은 의 황족(이씨)이 아닌 주의 황족(무씨)이 온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당장 무주 정권을 타도하고 당 왕조로 돌아가려 하여, 8월, 무연수를 구속하고 염지미를 가한으로 봉하고, 1만 기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정난·평적·청이 등의 군진을 공격하고, 정난군사 모용현석을 항복시켰다. 주는 총 45만 병력으로 방어했지만, 각지에서 참패했다. 무측천은 격노하여 묵철의 이름을 개명하여 '''참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돌궐군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고, 9월, 마침내 무측천은 당의 노릉왕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아사나 묵철은 비로소 군대를 물렸다.

699년, 아사나 묵철은 동생 아사나돌실복을 좌상찰[22], 아사나 골돌록의 아들 아사나묵거를 우상찰에 임명했다. 또한 아사나 묵철의 아들 아사나복구를 소가한으로 삼고, 위는 양찰 위에 두고, 처목곤부 등 십성(서돌궐)의 병마 4만여 명을 통솔하게 하고, 또 탁서가한이라고 칭했다. 700년 농우 제감의 말 1만여 필을 약탈했다. 무측천은 우숙정어사대부 위원충을 영무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이에 대비하고, 또 안북대도호·상왕 이단을 천병도원수로 삼아, 동돌궐을 토벌하게 했지만, 주군이 도착하기 전에 동돌궐군은 물러갔다.

장안 3년 (703년), 아사나 묵철은 사신 막하달간(바가 타르칸: Baγa tarqan)[23]을 보내 딸을 황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를 청원하고, 무측천은 노릉왕 이현의 아들인 평은왕 이중준·의흥왕 이중명을 사신으로 맞이하게 했다. 아사나 묵철은 대신의 이력탐한을 보내 입조하여 말 천 필 및 방물을 헌납하여 혼인을 기뻐했다.

신룡 원년 (705년), 대신과 장군에게 핍박당한 무측천이 노릉왕 이현에게 양위했으므로, 이현은 중종으로 당의 국호를 부활시켰다. 신룡 2년 (706년) 12월, 아사나 묵철은 또 영주 명사현을 침략했고, 영무군대총관 사타충의는 잠시 방어했지만, 관군은 패배하여, 사망자가 6천여 명에 달했다. 더 나아가 동돌궐군은 원주·회주 등에 진입하여, 농우의 군목마 1만여 필을 약탈했다. 신룡 3년 (707년) 1월, 중종은 그 혼인을 끊고, 사람을 모집하여 아사나 묵철을 참수한 자에게 국왕으로 봉하고, 제위대장군, 상물 2천 단을 하사한다고 했다. 또한 내외의 관원에게 파돌궐의 계책을 진언하게 했다. 경룡 2년 (708년) 11월, 서돌궐 수령 돌기시사갈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가한이 되었고, 동생 차노를 보내 변방을 침범했다.

경운 원년 (710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운 2년 (711년) 1월, 아사나 묵철은 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고, 송왕 이성기의 딸을 금산공주로 맞이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아사나 묵철은 그의 아들 양아지특근[24]을 보내 내조하게 하고, 우효위원외대장군을 제수받았다. 힐리 가한 이래 가장 강성했던 아사나 묵철이었지만, 노령이 되면서, 부락의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도망가게 되었다.

개원 2년 (714년) 2월, 아사나 묵철은 아들 이열가한(이넬 카간: Inäl qaγan) 및 동아특근(통가 테긴: Toŋa tägin), 사위인 화발힐리발[25]의 석아실필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북정도호부에 들이닥쳐 포위했다. 우효위장군 곽건관은 성을 굳게 지키고, 동아특근을 성 아래에서 사로잡아 참수했다. 이로 인해 동돌궐군은 철수했지만, 화발힐리발은 돌아가려 하지 않고, 그 처자를 데리고 당에 망명하여, 좌위대장군을 제수받고, 연북군왕에 봉해졌으며, 그의 처는 금산공주에 봉해졌다. 개원 3년 (715년) 2월, 십성부락의 좌상인 오돌륙 육철, 우상인 오노실필 오사근 및 아들의 사위인 고구려 막리지 고문간, 절첩도독의 아첩사태 등은 각기 그 무리를 이끌고, 총 1만여 장이 당에 망명했다. 현종은 그들을 하남의 옛 땅에 거주하게 하고, 고문간에게 좌위원외대장군을 제수하여 요서군왕에 봉하고, 아첩사태에게 특진·우위원외대장군 겸 절첩도독으로 삼아, 누번군공에 봉했다. 아사나 묵철의 사위인 아사덕호록 또한 당에 귀순하여, 특진을 제수받았다. 그해 가을, 아사나 묵철이 구성 (토쿠즈 오구즈: Toquz oγuz) 사결 (시키투: Sïqït) 부의 수령인 아부사 등과 기북에서 싸워, 구성철륵은 크게 궤멸되고, 인축의 많은 수가 죽었으며, 아부사는 무리를 이끌고 당에 망명했다.

개원 4년 (716년) 6월, 아사나 묵철이 또 구성철륵의 발예고(발야고, 바이란크:Bayïrqu) 부를 북쪽으로 토벌하여, 독락하에서 싸웠고, 발예고부는 대패했다. 아사나 묵철은 손해가 적었고, 경계를 소홀히 했는데, 발예고부의 탈주병인 힐질략과 류림 중에서 조우하여, 참살당했다. 발예고부는 학령천에게 아사나 묵철의 머리를 주어 경사로 보냈다. 아사나 골돌록의 아들 궐특근 (퀼 테긴: Kül tägin)은 옛 부대를 규합하여, 아사나 묵철의 아들 소가한 및 여러 동생을 살해하고, 궐특근의 형인 좌현왕 아사나 묵극련을 세워 비가 가한 (빌게 카간: Bilgä qaγan)으로 삼았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묵철 카간은 664년경에 일테리쉬 카간의 동생으로 태어났다.[6] 681년, 그는 형을 도와 당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동돌궐 제국을 부활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6]

689년, 묵철 카간은 당나라 변경 지역을 공격했다. 무측천은 설회의를 보내 요새를 구축하게 했다. 묵철 카간은 자하(紫河, 황하의 지류)까지 진격했지만, 당나라 군대와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철수하기 전에 찬위대(單于臺, 현재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시)에 기념비를 세웠다.

690년부터 692년까지 지속된 무측천의 천수 연간 초, 일테리쉬 카간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묵철련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묵철 카간이 카간 지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카간이 되었다.

2. 2. 통치 기간

묵철 카간은 즉위 초부터 당나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694년 령주(현재의 인촨)를 공격했고[10], 696년에는 거란족의 이진충손만영이 일으킨 반란을 지원했다. 이후 거란족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는 등 교묘한 외교 전략을 펼쳤다.[11][12]

698년, 묵철 카간은 당나라와의 혼인을 요구했는데, 이는 자신의 가문을 당나라 황족(이씨)과 결합시켜 당나라를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13] 무측천은 자신의 친척(무씨)을 보내려 했으나, 묵철 카간은 이를 거부하고 스자좡 남쪽까지 진격하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12]

묵철 카간은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내부 개혁을 단행했다. 699년, 동생 아시나 둬시푸와 조카 아시나 모질리안에게 각각 동쪽과 서쪽 날개를 지휘하게 하고, 아들 뵈귀를 소 카간으로 임명하는 등 권력을 분산하고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16]

700년, 농우 제감의 말 1만여 필을 약탈하는 등 계속해서 당나라를 압박했다.[20] 703년, 다시 혼인을 제안하여 무측천의 승낙을 얻어냈으나[16], 당 중종의 즉위로 인해 무산되었다.

705년, 묵철 카간의 군대는 링우에서 샤자 충이를 격파했고[16], 분노한 당 중종은 혼인 제안을 거절하고 카간을 죽이는 자에게 상을 내걸었다.

711년, 당 예종에게 혼인을 제안하여 금산 공주와의 혼인이 성사될 뻔했으나, 당 현종의 즉위로 인해 번복되었다. 같은 해 볼추 전투에서 톤유쿠크가 돌게쉬 군대를 격파하고[16], 713년에는 카를루크를 패배시키는 등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2. 3. 말년과 죽음

714년, 카파간 카간은 아들 이넬 카간과 통가 테긴, 사위 호바 엘테베르 아시비를 시켜 북정을 공격했으나, 포위 공격 중 통가 테긴이 사망하고 아시비는 당나라로 도망쳤다.[17] 그는 후오바 구이렌(火拔歸仁)으로 개명되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715년, 카파간 카간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과 고구려 출신 사위 고원젠(高文簡)과 아시데 사위 아시데 후루(阿史德胡禄)를 포함한 많은 부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후 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다.

716년, 카파간 카간은 반란을 일으킨 철륵 부족인 회골, 통라, 백계, 바이에르쿠, 설연타를 진압하고 돌아오던 중, 바이에르쿠 부족 출신인 셰질루에(颉质略)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7월 22일에 살해당했다.[10][17] 그의 머리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보내졌다.

3. 가족 관계

묵철 카간은 형의 미망인인 엘 빌가 카툰과 결혼했다.[18] 그는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름비고
이넬 카간
통가 테긴713년 북정에서 사망
모 테긴좌현왕
빌게 테긴우현왕
아시나 양워즈715년 사망
쿠클루크 빌게 카툰698년 ~ 723년, 아시데 훌루와 결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가오 원젠과 결혼
가간 둔 (카가 툰: 황후)
금산공주송왕 이성기의 딸
자녀비고
아사나 복구 (탁서 가한)
이전 가한
양아지 특근
동아 특근


4. 카파간 카간이 등장한 작품

5. 평가 및 영향

묵철 카간(아사나 묵철)은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적 수완을 바탕으로 돌궐 제2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끊임없이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가하며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20]

696년 거란의 이진충,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 카간은 이를 진압하여 돌궐의 세력을 확장했다.[20] 698년에는 무측천에게 아들을 보내고 딸을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했으나, 무측천이 이를 거절하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를 공격했다.[21] 이후에도 묵철 카간은 지속적으로 당나라를 압박하며 영토와 재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묵철 카간의 지나치게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내부 반란과 부족 이탈을 초래했다. 708년 서돌궐 수령 돌기시사갈이 반란을 일으켰고,[22] 714년에는 묵철 카간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가 북정도호부를 공격했다가 패배하기도 했다.[25] 715년에는 여러 부족이 당나라로 망명하는 등[25] 돌궐 제2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716년 묵철 카간은 발예고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방심하다가 탈주병에게 살해당했다.[24] 그의 사후 돌궐 제2제국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그의 조카인 비가 가한(빌게 카간)이 즉위하여 제국을 재건하려 노력했다.

참조

[1] 서적 Göktürk tarihinin meseleleri Türk Kültürünü Araştırma Enstitüsü
[2] 웹사이트 Tonyukuk’s Memorial Complex, TÜRIK BITIG http://irq.kaznpu.kz[...]
[3] 문서 Tarihte Türk adı
[4] 문서 L'Inscription de Bain-Tsokto
[5] 웹사이트 Turk Bitig https://bitig.kz/?la[...]
[6] 간행물 Acta Orientalia Academiae Scientiarum Hungaricae Akadémiai Kiadó
[7] 문서 ED
[8] 문서
[9] 문서
[10] 문서 Old Book of Tang http://zh.wikisource[...]
[11] 문서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12] 문서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13] 서적 A history of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06-28
[14] 서적 Empress Wu the Great: Tang Dynasty China https://books.google[...] Algora Publishing 2008
[15] 논문 Chinese "Qaghans" Appointed by the Türks https://www.academia[...]
[16] 서적 Gök-Türkler Türk Tarih Kurumu Basımevi 1995–2004
[17] 문서 Empire of the Steppes
[18] 논문 Parenté et organisation sociale dans le domaine turc 1972
[19] 문서 従来はカパガン・カガン({{lang|otk|Qapaγan qaγan}})と読まれてきたが、D.Sinor『Qapγan』(1954年)、G.Clauson『A Note on Qapγan』(1956年)、R.Giraud『L'Empire des Turcs Célestes.Les régnes d'Elterich,Qapghan et Bilgä (680-734)』(1960年)などにより、カプガン・カガン({{lang|otk|Qapγan qaγan}})とする説が有力となっている。
[20] 문서 「国家を糾合したる」の意。
[21] 문서 咸亨年間(670年 - 674年)に、東突厥諸部落の来降附者の多くは、豊・勝・霊・夏・朔・代の六州に移住させられた。これを降戸と言う。
[22] 문서 シャド(Šad、設、察、殺)とは、突厥や回鶻における官職の一つ。
[23] 문서 タルカン(Tarqan、達干)とは、突厥や回鶻における官職の一つ。
[24] 문서 テギン(Tägin、特勤)とは、突厥や回鶻における皇太子もしくは王子に与えられる称号。
[25] 문서 イルテベル(頡利発、Iltäbär)とは、突厥可汗国の統制下において、突厥可汗によって各部族長に与えられた称号の一つ。
[26] 문서 《구당서》, 19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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